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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A day's walk (2)





ELLE-girl 2011/NOV : A day's walk (2)









 전날 비가 시원하게 내려서인지 계절은 가을에 한걸음 더 가까이 다가온 것 같았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파랗고, 공기가 깨끗해 멀리 있는 건물들과 산들도 또렷하게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햇살이나 공기가 바뀌었다는 것이 몸으로 느껴졌다. 플라토 에서 덕수궁을 지나 광화문까지 걷기 시작했다. 마치 외국인 관광객이 된 기분으로. 

















 학고재 갤러리에서 열리는 Tim Eitel 의 The Placeholders 라는 전시를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학고재 갤러리는 한옥으로 만들어져 왠지 고즈넉하고 한국적인 멋이 있어 독일의 현대 회화와의 조화가 어떨까? 궁금한 마음이 들었다. 들어가자마자 마주하게 되는 그림은 파란 하늘 밑에 작은 아이 두 명이 쪼그리고 앉아있는 그림으로 캔버스 위의 파란 하늘은 지금 내가 있다가 들어온 바깥의 파란 하늘의 연장선에 놓인듯한 느낌이었다. 구름도, 건물도, 나무도 아무것도 없는 비현실적인 공간. 넓게 칠해진 파란색에 압도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조그마한 정사각형 모양의 캔버스들과 제법 큰 캔버스들이 어떤 리듬감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었다. 단순한 색채와 형태로 고요한 정적 또한 담고 있는 듯 한 그의 그림은 한옥과도 제법 잘 어울렸다. 배경 또한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어, 흐르는 순간의 일시 정지된 이미지들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림속의 사람들이 방금 전까지 살아 존재하고 있었지만, 지금 이순간만은 나 혼자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것만 같다는 착각도 들었다. 사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도 그림속의 사람들을 죽은 사람처럼 혹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어떤 환영처럼 보듯이, 살아있는 누군가를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것 취급한 적은 없는지 모를 일이란 생각도 들었다. 
 

 작품에서 채워짐보다 비워냄이 중요한 것은 그 덜어내어진 빈 공간에 관객이 참여하여 그림을 그려낸다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와 관람객 두 사람이 힘을 모아 완성해낸 작품은 관람객의 마음속에서 어떤 명화에 비해도 모자람 없는 무게로 그 사람의 인생에 작던 크던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 같다. 나 역시도 팀 아이텔의 그림을 보면서 그의 세계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기도 하고 몇 걸음 떨어져보고, 외면해보기도 하면서 나만의 그림을 완성하였다. 눈 여겨 보지 않았던 것들의 존재성을 새롭게 인식하면서 무신경하게 지나가던 나의 세계 속 타자들을 의식하게 된 기분이다. 











* 갤러리에서 사진촬영 금지입니다. (저는 취재였기때문에 허락받고 촬영했습니다..)























아라리오 갤러리에 도착. 아트선재센터에서 아라리오로 가려면 유명한 중국 만두집을 지나가야 했다. 중국의 부부 미술 작가인 순위 & 펑유의 전시를 보러 가면서 중국 만두집을 지나가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평일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걷고 있었고, 갤러리가 있는 골목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진을 찍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갤러리 벽에 부착되어진 포스터를 찍고 있는데 쾅! 하며 축구공이 날아왔다. 깜짝 놀랐다. 원래는 텅 비어있던 공간이 유리로 막혀있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계속해서 축구공이 날아왔다. 쾅쾅 소리를 내며 날아와 부딪치는 공은 길을 걷던 사람들을 긴장하게 만들고 집중하게 만들었다. 갤러리 안쪽으로 들어가니 거대한 바위로 된 머리를 한 어른들이 권위적인 포즈로 앉아 있는 조각상이 설치되어 있었고, 그들의 시선 끝에서는 축구 유니폼을 입은 아이(컨셉의 어른 축구선수)가 신나게 밖을 향해 공을 차고 있었던 것이었다. 조용히 미술 작품을 감상하는 갤러리의 개념을 전복시키는 파격적인 전시였다. (실제로도 갤러리에서 공을 차다니 무슨 짓이냐며 아이를 혼내러 들어오는 어른들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유리창 밖에서 자유롭게 뛰어다니며 공을 차는 남자 아이를 보고 깜짝 놀랐던 나는 갤러리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돌 머리의 어른들의 군상을 보며 혹시 나의 머리도 저들과 같지 않을까? 저들 사이에 앉아 있어도 구분가지 않을 만큼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생각들을 하면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오늘 본 전시들이 각자의 개성은 다르지만 (전시를 볼 때의 내 개인적 성향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한가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는 것. 그리고 그런 경험들이 그냥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들 속에 능동적으로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으로 살아 '지고' 있는 매일을 조금은 새롭게 환기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꼭 일부러 전시를 찾아가 보는 것이 아니라도 그냥 스쳐가는 일상의 조각들에 미술 작품을 바라보듯 작은 관심을 갖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리라 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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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LLE girl 11월호에 실린 
'산책' 칼럼의 원본 글 입니다.
 
협조해주신 학고재, 아라리오 갤러리와 
늘 재미있는 일 맡겨주시는
황지명 기자님께 감사드립니다 :)